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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최대 규모의 불교사원 앙코르와트를 건립할 정도로 융성했던 크메르제국 캄보디아, 12세기만해도 크메르제국은 인근 국가였던 태국과 라오스, 베트남으로부터 조공까지 받아낼 정도로 막강한 국가였는데요. 오늘은 영광의 과거를 간직했던 캄보디아의 역사, 그리고 잘못된 지도자가 저지른 만행인 킬링필드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찬란했던 과거의 역사, 크메르제국

 

12세기 인도차이나를 호령했던 크메르제국, 즉 지금의 캄보디아는 15세기들어 태국의 침략에 앙코르였던 수도를 오늘날 캄보디아의 수도인 프놈펜까지 옮겨야했고, 16세기 후반에는 프놈펜까지 빼앗기며 민족 역사상 최대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캄보디아는 지정학적으로 태국과 베트남 사이 끼어있어 지속적으로 양국의 위협에 놓인 상황이었는데요. 

 

국력이 쇠락할대로 쇠락한 캄보디아의 국왕은 국난을 헤쳐나가고자 결국 1863년 프랑스와 수호통상보호 조약을 체결했는데요. 말이 보호조약이지, 사실 캄보디아를 전초기지로 사용해 강대국이었던 프랑스가 위로는 태국, 아래로는 베트남을 점령한다면 최소한 양국의 위협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죠.

2. 비극의 시작, 베트남전

 

시간이 흘러 1953년 국왕 시아누크를 앞세운 캄보디아 왕국이 수립되게 됩니다. 하지만 평화도 오래가지 못했는데요. 1955년부터 남북간 전쟁중이던 베트남전에 1964년 통킹만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대격변기가 시작됩니다.

 

이때 미국은 국왕 시아누크를 끌어내리고 당시 국왕의 오른팔이었던 론놀을 지원해 캄보디아에 친미정권을 세우게 되는데요. 캄보디아에 뜬금없이 친미 정권이라니 아이러니할 수도 있지만 베트남전 양상을 보면 그것도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베트남군의 땅굴은 북부지역부터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관통해 남부지역까지 이어지고 있었는데요. 당시 국왕이었던 시아누크는 베트콩들의 땅굴이 자국을 관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못본채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 미국에게는 눈에 가시거리였죠.

 

이렇게 캄보디아에 친미정권을 세운 미국은 캄보디아 영토내 일명 호치민 루트를 중심으로 무차별 폭격을 시작합니다. 이때 미국은 1973년까지 포탄 54만톤을 쏟아붓게되는데요. 이 과정에서 민간인 사망자가 최소 10만에서 최대 50만여명까지 이르게 되면서 친미정권이었던 캄보디아에 반미 바람이 불게되는데요.

 

더군다나 1973년부터 미국이 철군을 시작했고, 미군 철군에 정치적 위협을 느낀 론놀도 1975년 하와이로 망명하면서, 반미세력을 등에 업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학살자 폴포트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3. 역사상 최악의 공산주의자 폴포트

캄보디아의 독재자 폴포트

 

자본주의자는 죽어주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민을 돕는 길이다

폴포트는 공산주의세력이었던 크메르루주의 수장으로, 반미세력이 확산되던 시기를 틈타 단숨에 캄보디아 절반을 본인의 손아귀에 넣는데 성공합니다.

 

문제는 폴포트의 롤모델이 전국민을 농부로 만들었던 중국의 마오쩌뚱이었단 것인데요. 

 

서구 물건을 사용하면 서구 물건을 사용한다고 죽였고, 영어를 사용하면 자본주의에 물든 반동분자라며 죽였고, 아이들이 태어나면 부모와 분리해 국가가 운영하는 교육시설에서 합숙교육시켰습니다. 이 밖에도 하루아침에 거의 모든 국민들의 직업이 농부로 강제 전직되었는데요.

 

기존 의사나 변호사 등 지식인들은 자본주의자가 될 수 있다며 더더욱 농부가 되어야만 했고, 교육시설에서는 공산당에서 교육받은 공산당원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4. 킬링필드의 시작과 끝

폴포트는 1975년 집권과 동시에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바꾸고 무자비한 탄압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는데요. 이중 대표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킬링필드란 지식인계층이 변절 우려가 높다며 의사와 교사, 변호사, 유학파 등 소위 엘리트 계층으로 분류되는 직업군과 고등교육 이상을 받은 시민들을 모두 학살해 캄보디아 전역을 사지로 물들여 버렸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영화 킬링필드 스틸컷

무자비한 학살 아래, 1960년도 650만명에 달했던 캄보디아 인구는 1975년까지 750만명으로 늘어났으나, 킬링필드를 거치면서 1979년 인구는 670만명으로 80만명이 감소합니다. 이는 단순히 80만명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연출생분까지 포함해 약 140만명이 줄어든 것으로 당시 캄보디아 인구 7명중 1명이 사망했으니, 5000만명의 대한민국 인구로 치환한다면, 700만명이 사라진 것으로 볼 수 있겠군요.

 

폴포트가 자행했던 학살에서는 고문과정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는데요. 어쨌든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점령하면서 이같은 참상이 국제사회로 알려졌고, 훗날 영화로도 제작돼 많은 관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폴포트는 친베트남 성향의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정글로 도망쳤고, 1998년 심장마비로 급사하게 됩니다. 폴포트의 시체는 옛 부하들에 의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쓰레기와 함께 불태워지면서 비극적인 말로를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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